미국/뉴욕(Jun-Jul 2008)

NY 20080628-밤 졸면서 탄 2층 버스

나들이쟁이 2009. 4. 15. 11:23

너무 멋졌던 뮤지컬 시카고. 뮤지컬이 끝난 후 아저씨들은 피곤하다고 숙소로 돌아가셨는데 난 숙소로 돌아갈 맘이 생기지 않았다.

"내일 파나마 가는 비행기에서 실컷 자면 되지 모...."

그래서 무작정 사십몇번가에서 출발하는 빨간색 2층 투어버스표를 사고 야경 구경을 시작했다. 돈을 너무 아끼지 않고 많이 쓰신거지...지금 와선 얼마를 썼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내가 탄 버스는 다운타운과 브루클린을 도는 노선. Gray Line이었다. 무슨 다른 버스도 있었던 것 같은데 경쟁업체끼리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Gray Line의 가이드가 "Woo~"하며 야유를 부추겼던 기억이...유치하지만 뭐, 사람들은 재미있어 하더라. 이 버스 2층에 탔는데 나뭇가지에 다치지 않도록 은근 조심해야 했다.




막 출발하기 시작한 버스. 타임스퀘어 주변은 너무 막혀서 한동안 빠져나가기가 힘들었다. 그나저나 2층버스 난간이 별로 높지 않다. 졸다가 휘청하면 자칫 위험할 수도 있겠다.


낮에 본 것과 또 다른 타임스퀘어. 밤이든 낮이든 정이 안 가는 모습.브로드웨이와 7 Avenue 교차점을 지나 7 Ave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 맨해튼 같은 직교상 도시는 좌표 파악하면서 다니는 재미가 쏠쏠.

7 Ave와 42rd street만나는 사거리에서 42rd로 좌회전 중....인 듯.
당시엔 생각 안하고 그냥 다녔는데 그래도 다 기억하는 방법이 있다.
우선 사진의 표지판을 보니 7 Ave가 맞고, 버스 난간 각도와 사람들 앚은 방향를 볼 때 좌회전이 맞다. 나는 어디 여행 다닐 때 사거리에서 표지판 찍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형편상 열심히 메모하면서 천천히 다니기 어려운 여행일 때는 일단 사거리 표지판들만 열심히 찍어두어도 나중에 내가 어떤 Route로 다녔는지 다시 지도에 그리기가 쉬우니까. 제일 좋은 것은 그때 그때 잘 기억하는 것이지만.

그런데 이 사진은 달리는 차 안에서 대충 찍어서인지, 표지판이 부실했는지 몇번째 Street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사진 바로 다음에 찍은 사진(너무 흔들려서 올릴 순 없지만)에 담긴 거리가 혼자서 산책한 42번가와 똑같은 모양이었기 때문에(크라이슬러 빌딩 덕에 기억하기가 아~주 쉬웠다.) 음..42번가로 좌회전했구나, 했다.

별것도 아닌데 오래 쓰는 것은, 그냥 내가 이런 것을 좋아하기 때문..전혀 유용한 정보는 아닌 것 나도 알아용^^

maps.google.com 들어가서 7 Ave를 따라 내려가다가 42rd 만나서 좌회전할 때의 지형지물 사진을 찾아봤더니 내가 다닌 길이 맞았다. 재미있었다.
별건 아니지만 나한텐 즐거운 놀이. 머리로 지도 그려보고 실제로 맞는지 확인해 보는 것. 그나저나 찍을 땐 몰랐는데 저 사거리에 마담 투소 박물관이 있었는 모양이다. 간판이 보이넹....뭐, 알았어도 안 갔겠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 똑같이 만들어둔 게 뭐 재미있을까 싶다.


초반에는 눈을 부릅뜨고 표지판도 찍어가며 열심히 지켜봤지만, 정작 열심히 지켜보고 즐겼어야 할 후반부에는 너무 피곤해서 제대로 보질 못했다. 사진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졸면서 찍었으니 죄다 흔들리고.
북적북적한 야시장같은 거리도(아님 축젠가?), 맨하탄 다린지 브루클린 다린지의 입구인 것 같은 유명한 장소도, 맨하탄 다리에서 바라본 브루클린 다리도, 브루클린에서 바라본 맨하탄 야경도, 어렴풋이 좋았다는 기억은 나는데 다 엄청나게 흔들린 숭한 사진으로만 남아버렸다. 뭐...이번엔 어차피 가벼운 마음으로 들린 것 뿐이니까....이런게 있구나..하고 답사 정도 왔다 생각하면 되지.

새벽 1시쯤인가 투어가 끝났는데 12시쯤부터는 정말 정신없이 졸았다. 덕분에 브루클린에서는 사정없이 나뭇가지에 얻어맞았고, 다시 맨하탄으로 돌아와서 록펠러 센터 근처 쯤을 지날 땐 졸다가 휘청해서 정말 2층 버스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그리니치 빌리지나 소호 같은데는 분명 지나갔는데 기억이 거의 안난다. ㅠㅠ. 일행도 없이 혼자 관광 버스에 앉아서 상모 돌리고 농악놀이하며 자고 있는 초췌한 동양 여자...숭하다. 길거리는 온통 토요일 밤을 불사르려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는데 난 훤히 보이는 2층버스에서 잠이나 자고 앉았고.... 근데 이 버스 타고 다니면서 내가 구경을하는건지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버스탄 관광객을 구경하는건지 헷갈리더라. 그래도 다음에 방문하면 한 번은 더 탈 것 같다. 하루 정도 이거 타고 시내를 전체적으로 훑어본 후 맘에 드는 곳을 차례로 다니면 좋을 것 같아서.

어쨌든 투어는 무사히 끝났고, 타임스퀘어 쯤에서 내려서 6~7블록 정도 걸어서 호텔로 돌아갔다. 사람이랑 차로 꽉 차서 택시로 가긴 어렵겠더라...그런데 타임스퀘어 조금만 벗어나니 은근 으슥해서 좀 겂났당......덩치 큰 아저씨들만 모여 있는 곳 지나갈 때는 괜히 통화하는 척 전화기 붙잡고 헛소리를 지껄이기도. 어쨌든 1시 넘어 숙소에 도착해서 죽은 듯이 잤다.


<정리>
12시간 동안 꽤 많이 돌아다녔다. 돈 많이 쓰면서...
평소의 나라면 안 그럴텐데, 하루만 있을건데 뭐...하면서 센트럴파크 인력거 값, 뮤지컬 관람비, 투어버스비 등을 거침없이 지르고 카메라까지 그냥 사버렸다. 출장비 남을 것을 여기서 다 써버린 듯. 잘 모르고 예약했던 숙소비도 만만치 않았고.......정말 뭔가에 홀린 듯 경제관념을 저 멀리 던져두었다. 2주간 파나마에서 쓴 돈보다 뉴욕에서 각각 1박씩 도합 2박하는 동안의 비용이 더 많았다. 생각해보면, 새 직장에서 업무에 적응하느라 이런 저런 스트레스가 심했던 시기라 잠시 정신줄을 놓았던 것 같다.
부끄러워서 내용을 적을 수도 없는 비용지출이었다.

이번에 여행사진을 정리하면서 절감한 것은,
1. 여행비용, 여정, 느낌 같은 것은 곧바로 정리, 기록해야 한다는 것과 2. 예쁜 곳에 갔으면 예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

여행비용을 잘 정리해가면서 여행해야 쓸데 없는 지출을 줄일 수 있고, 여정을 잘 정리하면 다음 여행을 잘 꾸리는 데 도움이 되고, 느낌을 잘 기록하고 좋은 사진을 남기면 같은 비용을 들인 여행도 훨씬 더 깊이 누릴 수 있다. 이 얼마나 경제적인가. 개념 없는 여행을 해보고 싶었던 욕망은 충분히 충족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개념찬 여행만을 하리라.

그랜드캐년이나 대만의 화련 같은 곳을 갔었을 때는 똑딱이로 대충 찍어도 뭔가 멋있어 보이는(기준이 매우 낮은 내 눈에만)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좋은 사진을 찍는 것보다는 맨 눈으로 열심히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진 찍느라 편히 구경 못하고 멀미하는 애들 볼 땐 더더욱.

그런데 뉴욕을 다녀오고 나서 그런 생각이 많이 수정되었다. 골목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느꼈던 그 즐거움들이, 사진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아서  내가 정말 다녀오긴 다녀온건지 헷갈리더라는....그리고 그렇게 퍼부은 돈들이 아까워지더라는....."아주 좋았다"는 기억과 핵심적인 장면 몇몇 외에는 남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맨 눈으로도 열심히 보고, 좋은 사진도 많이 남기는 여행이 좋은 여행인 것 같다. 이제부터 사진 배워서 나중에 여행 다닐 때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기억들을 남겨야지....

그래서 어제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셔터속도, 조리개 여는 정도, 필름의 감도, 이른바 노출의 트라이앵글에 따라 사진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아직 몇 장 안 읽었지만 재미있다. 남자친구 카메라로 실습도 해보았는데 정말정말 신나더라는*^^*